한때 사람들의 삶과 꿈이 오갔던 마을도 세월 속에 이름을 잃고 지도 속 흔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개발, 전쟁, 자연재해, 행정 개편 등으로 사라진 지명은 단순한 땅의 표시가 아니라, 그곳을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과 문화가 담긴 역사적 자취입니다. 잊힌 마을 이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삶의 흔적을 되새겨봅니다.

1. 지도 속에서만 남은 마을들
우리 주변에는 더 이상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지만, 옛 지도 속에만 기록된 마을 이름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고지도나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리’ ‘○○동’ 같은 이름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런 이름은 도로와 건물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바뀌었거나,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통합·삭제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독립된 마을로 불렸던 곳이 도시가 커지면서 큰 행정구역에 흡수되면, 원래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그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지도를 들여다보거나, 동네 원로들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자리에 예전에는 소나무골이나 우물터마을 같은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지도는 단순한 길 안내 도구가 아니라, 사라진 이름과 기억을 불러오는 열쇠이기도 하다.
2. 사라진 지명의 이유 – 개발과 변화의 그림자
마을 이름이 사라지는 이유 중 가장 흔한 것은 바로 개발이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옛 마을은 흔적도 없이 아파트 단지와 도로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명도 행정 편의상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서울의 강남 일대는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논과 밭이 있던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논골, 개포리 같은 이름들이 있었지만, 개발과 함께 새로운 행정동 명칭이 붙으면서 옛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또한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마을 자체가 소멸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 전투로 불타버린 마을이나, 홍수와 산사태로 사라진 마을은 행정 기록에서도 빠르게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겨진 이름은 지도 속에만 남았다.
이 밖에도 행정구역 개편은 지명을 지우는 큰 원인이 되었다. 마산, 통영, 진해 같은 도시가 통합·분리되면서 기존의 동네 이름들은 새 행정 체계에 맞춰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예전 이름을 입에 올리며 추억을 나눈다.
3. 이름이 사라져도 남아 있는 기억과 흔적
지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곳의 기억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옛 이름은 구전과 생활 속 흔적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지도에는 ‘○○동’이라고 적혀 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고개마을이나 솔밭골이라고 부른다. 이런 비공식적 지명은 세대를 이어 구전되며 살아남는다. 또한 건물 이름이나 상호에 과거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슈퍼’, ‘○○약국’, ‘○○교회’ 같은 간판은 지금은 공식 지명에서 사라진 마을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작은 흔적들을 통해 우리는 옛 이름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마을 이름이 사라져도, 그곳에서 자라난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이름은 ○○였어’라는 증언은 지도 한 장보다 더 생생하게 사라진 마을을 되살려 준다.
4. 잊힌 이름이 주는 역사적 의미
사라진 마을 이름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조각이자,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통로다.
예를 들어 말무덤골 같은 이름은 실제로 그곳에서 말이 죽었던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장터마을은 그곳이 과거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지역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진 지명을 복원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단순한 향수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되새기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하는 역사적 자산이 된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과 지자체가 지명 조사 사업을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잊혀진 이름을 찾아내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후세에 남길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사라진 동네는 단순히 행정상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속에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 희로애락, 그리고 공동체의 흔적이 담겨 있다. 지도가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라 해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 역사와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사라진 지명을 되새기는 일은 과거를 추억하는 동시에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도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의 이름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과 이야기를 읽어내야 한다. 지명은 단순한 주소가 아니라, 시간과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